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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4/ 19 새벽예배

Q.T/두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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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경영자 예수

 

미국에 로리 존스라는 여성경영인이 있다. 여성 경영인으로 크게 성공했다. 성경의 예수님의 경영을 본받아 실천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하였다. 자신의 저서 "예수의 오메가 리더십"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최고의 경영이라는 뜻이다. 알파 리더십과 베타 리더십이 있다. 알파리더십은 남성적인 지도력이다. 권위적이다. 앞장서서 이끈다. 베타지도력은 그와 반대로 여성적인 지도력을 얘기한다. 이해하고 감싸주며 밀어준다. 로리 존스는 성경의 리더십은 차원이 다름을 얘기한다. 예수님의 오메가 지도력의 핵심 5가지를 얘기한다. 첫째, 부드러우면서 강력한 것이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촛불도 꺽지 아니하시고 약한 자들도 붙드시는 지도력"이라고 표현한다.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지도력이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너희는 내게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리하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느니라"라고 하였다. 잔잔한 햇빛처럼 부드러운 가정이 그것이다. 부드러운 것을 온유라고 한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부드러우면서 강력한 것이다. 목숨을 걸 만큼이다. 두 번째는 온갖 고통 중에서도 자신을 실천하는 지도력이다. 마가복음 10장 32절은 행동의 복음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고 설명하시되 그들이 이방인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이 능욕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결국 십자가에 죽을 것이나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지도력은 최악의 시련을 넘어서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끈기 있는 강인한 지도력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제 삼일의 신앙이라고 하였다. 고통이 있지만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움츠리고 주저앉으면 안 된다. 부활의 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정치도 가정도 그렇다. 오메가 리더십은 경영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예수님은 경영학 박사나 경제학 박사학위가 없어도 최고의 경영인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 번째는 누가복음 6장 12절에 팀워크를 이루신 것이다. "이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새 기도하시고 마치신 뒤에 제자들을 부르사 열둘을 택하여 사도로 칭하셨으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에 지장을 주는 스타일이 자기 혼자 잘하는 사람이다. 혼을 깨우치고 팀워크를 이루어서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사명감을 주셔서 쓰시는 것이다. 같이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네 번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주시고 동기를 부여하셔서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게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게 가르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하였다. 성도와 교회에게 주시는 지상명령이다. 교육명령이다.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명령이다.

 

비전을 주시고 동기를 부여하고 힘을 주고 사역자를 길러주셨다.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사람들로 하여 정열을 가지고 인생을 살 수 있게 자신을 바치게 하였다. 복음에 인생전체를 투자하게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 3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너의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게으른 사람, 놀고 있는 사람을 쓰신 적이 없으시다. 자신을 불태우고 가슴이 뜨거운 사람, 인생을 투자하는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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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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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꾼

 

마태복음 11장 28~30절

 

 

지난해 서울 시내 상당한 규모 교회에 초청되어서 기독교 교육에 대해 강의해 보라고 요청받았다. 젊은 학부형을 모아 놓고 얘기하러 갔었다. 그날 모임을 마치고 젊은 부목사님이 얘기하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전 주에 수련회를 데리고 갔는데 저녁 집회 시작하고 나서 그중에 눈에 띄는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 아이의 부모는 열심히 섬기는 집 장남이었다. 집중을 못하고 있길래 불러서 야단을 쳤다. 그 아이가 분노가 가득 차서 노려보았다. 그래서 방에서 깊은 대화를 얘기를 하였다. "나는 우리 아빠가 믿는 하나님이 싫습니다. 찬양과 설교도 듣지도 부르지도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 아이는 공부를 정말 잘하였다. 그런데 성적이 떨어졌다. 아버지가 야단쳤다. "하나님이 너를 보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냐"라고 호통쳤다. 그런데 이때부터 하나님과 아빠를 똑같이 생각하였다. 하나님이 과연 미워하실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중학교 1학년이라 분별하지 못한다. 아빠에 대한 분노가 하나님과 동일시된 것이다. 가정예배가 지옥이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세운 일꾼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세움 받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입장이 바뀌지만 우리가 가진 직업도 섬김의 도구인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 직업이나 가져선 안된다. 우리가 하는 일의 목적은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구여야 한다. 사회에 나가서도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일꾼이어야 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부부로 사는 것도 주의 일꾼인 것이다.

 

"너희는 서로 돕는 베필이 돼라"라고 하셨다. 부부에게 서로 부탁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만 성경을 읽다 보면 곧 깨닫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꾼으로 만드시는지 생각해 보자. 첫째가 일꾼의 조건이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10억? 100억? 과연 이렇다면 과역 기독교 교인인지 질문해야 한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사도들이 돈이 필요한가? 사도바울도 성도의 헌금과 스스로 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나님의 일이 잘 되는가? 잘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모든 일꾼은 28절에 답이 있다. 아무리 어떤 조건이 좋아도 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일꾼이 될 수 없다. 예수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모든 사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다. 내가 이 짐을 지고 비틀거리는 동안에는 아무리 좋은 여자와 남자를 만나도 한 이불을 덮어도 돕는 베필은 되지 못한다. 결혼하고 사랑해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는 이 짐을 누구도 지어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아이의 성적이 떨어진다면 아이와 대화하려고 시도는 안 하고 그냥 짓누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들먹거린다. 부목사가 준 글을 보는데 정리정돈을 잘하는 남편이 나왔다. 남편이 보기에 아내가 맘에 안 든다는 것이다. 항상 남편이 치운다는 것이다. 아내에게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아내에게 화가 난 것이다. "당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야 네가 좀 해라. 왜 마누라를 들들 볶냐?"라고 하셨다.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내를 돕는 자가 되었다. "다 끝났어? 내가 화장품 잠가 줄까?"라고 하였다. 아내를 돕는 자로 바뀌었다. 자기가 변화되었더니 아내가 변했다. 아내가 잠그기 시작했다. 내가 섬길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비판하는 것이 짐인 것이다. 주님이 내려놓게 하시는 것이다. 어느 날 어떤 목사가 시편 23편 1절~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ㅁ뭐가 더 필요해"라고 제목이 잘못 작성되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굉장히 괜찮은 설교제목이었다. 그래서 이 제목으로 설교를 다시 작성했다. 우리도 이런 제목으로 질문해 보자.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된다고 파고든다. 우리 모두에게 파고든다. 그런데 그분이 인도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뭐가 필요한가? 그렇지만 간단치 않다. 왜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인가? 웬 원수인가? 원수가 없는 데로 가고 싶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사막이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죽음이 가득하다. 곳곳에 원수가 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다. 이런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믿음을 요구하신다. 원수가 있는 곳이건 사막이건 간에 안전한 목적지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말씀만 하셨지 그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짐을 지워주시는 것이다. 죄 짐을 지어주셨다. 이것은 누구도 지워줄 수 없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을 친히 감당해 주시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지금도 딴생각한다. 그 처참한 광경을 생각해 보라.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은 너무 리얼하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이다. 버트 러셀은 1960~1970년대에 유명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였다. "여호와라는 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신 것을 두고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할 수 있나? 나는 이런 신을 믿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달린 모습은 죄의 잔혹함이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처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어디에서 왔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면 어떤가? 모든 사람들이 한 꺼풀 벗겨 내면에 들어가면 죄와 어둠이 가득하다. 그것이 성경의 진단이다. 사람을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정도밖에 못 본다. 노무현 대통령과 최진실 씨를 같은 해 보았다. 그 두 분의 죽음은 이렇게 기억한다. 노무현의 절개와 의기를 존경했다. 노무현에게 표를 던졌을 때 장로들이 반대했다. 장로라고 집사라고 표주 자고 해서도 안된다. 그 사람이 저 자리에 적합한지 봐야 한다. 패거리 표는 안된다. 노무현을 종로 3가에서 보았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정치 철학을 존경해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죽으면 안 되었다. 자살해서는 안되었다. 공고출신이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했지만 인생의 무거운 짐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어도 그런 것이다. 최진실을 보자. 하룻밤 드라마로 천만 원을 벌었다. 그 정도 능력 있는 여자도 자살하였다. 미모를 가져도 국민여배우라는 타이틀도 해결할 수 없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지실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있는 열등감이 있어도 내게로 오라고 하신다. 짐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심을 경험해야 다른 사람이 보인다.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몽땅 져 주시는 것이 아니다. 상당 부분 남겨져 있다. 사도바울을 보라. 걸레처럼 자신을 주를 위해 드렸다. 바울에게 가시가 있었다. 세 번 기도했다. 하나님 앞에 몇 날 며칠을 간곡하게 구했을 것이다.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바울 자신의 병을 응답하지 않으셨다. 몸이 너무 힘드니 다시 기도했다. 응답하지 않으셨다. 한 번 더 했지만 응답했지만 "노"라고 하셨다. 훗날 그는 "응답하지 ㅇ낳으신 것이 내게 은혜였다"라고 고백하였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수고하고 힘든 짐을 내려놓으면 쉼을 얻는 것이다. 또 멍에가 있다. 결혼은 주님의 아이디어이다. 서로 돕는 베필이 되는 것도 지키면 복이 되는 것이다. 29절에 두 번째 쉼이 있는 것이다. 주님이 내게 지어주신 짐을 짐 어질 때 두 번째 쉼을 주시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여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섬길 때 생기는 것이다. 내 자식을 키우며 하나님의 자식을 키우는 것이다. 여기에는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축복의 약속이 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일꾼이 되는 것,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은 쉬운가? 부부간에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건 편한데 내가 저 인간을 섬겨야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서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순종과 사랑 모두 포함한다. 쉽지가 않은 문제이다.

 

서로 돕는 베필이 되라는 것이다. 부모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도 효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안 믿는 자와 똑같이 세상을 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무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30절에 "내 멍에는 쉽다"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면 어렵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쉬운 것이다. 어떻게 해야 쉬운 것인가? 천국 가면 쉬운 것인가? 여기에서 살아야 할 것을 다루는 것이다. 29절에 보면 "배우라"라고 하신다. 배우면 쉽다고 하신다. 못 배우면 어려운 것이다. 저는 결혼해서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어머니는 "네가 설거지를 해라"라고 조언하셨다. 저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걸 보고 친구들이 자기 안사람과 대판 싸웠다고 하였다.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하냐?"라고 물었다. 저는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에 쉽게 한 것이다. 부모가 하는 것을 보면 쉬운 것이다. 훈련을 받으러 부부세미나에 간 적이 있다. 서로 마주 보고 "사랑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부모가 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만 가지 언어 중에서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는 아랍어라고 하였다. 선교사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한 반은 영어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언어학자가 뽑은 그다음 언어가 한국어라고 하였다. 존칭어가 어렵다. 우리는 한국어를 어렵게 배우지 않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배우기 어려운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 제가 영국에서 공부를 할 때 식사를 할 기회가 있어 젓가락으로 집어 올렸더니 영국얘들이 놀래했다. 신기해했다.

 

오래된 사람이 되면 배우기가 쉽지 않다. 목사가 안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것이다. 온유, 겸손 갖는다면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일꾼이 될 것이다. 어떤 부처에 있던 분이 사인을 한번 하면 국민의 세금이 바로 나가는데 마지막 결정할 때 신앙양심을 보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을 갖는 다면 놀라운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수천 년 동안 일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 친구가 꿩 목장 간 얘기를 해줬다. LA에 꿩 목장이었는데 지붕을 열어놔도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꿩에 모자를 씌어놓았다는 것이다. 새는 대가리가 작기 때문에 하늘이 보이지 않으면 날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120년 동안 경고하시는 것이다. 살인자, 사기꾼도 포함되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들다가 못 탄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먹고사는 것에 매달리다가 날아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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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3/ 30 금요부흥회

Q.T/할렐루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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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따라간 예수님

 

누가복음 23장 26~27절

 

 

우리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가장 많이 슬펐던 때가 가장 행복한 때였다. 은혜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일생 중의 하나님의 특별한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많은 눈물을 흘렸던 때인 것이다.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죄와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가기 부족한 자신의 때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격 안에 기쁨과 슬픔과 같이 담길 수 없지만 영적인 세상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기쁠수록 눈물 흘리는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다. 눈물로 찬송과 성경을 읽으며 눈물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던 때인 것이다. 이 지상에서 한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 가장순수한 때는 어떤 때인가? 한 성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순수한 때는 바로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와 사랑과 은혜가 너무 크지만 내가 미천해 보이는 그때이다. 바로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받아들일 순종의 준비가 되어있고 이 세상의 있는 것들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인 것이다. 영국의 찰스 스펄전 목사는 "성도의 마른눈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라고 하셨다. 원래 십자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집행방법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죄인 이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빌라도 앞에서 사형 언도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있지 않다. 죄가 없으신 분이며 처음부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못 박아 백성들을 선동하였다. 법을 모르는 우리가 보더라도 잘못된 재판인 것이다. 재판이라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벌주는 제도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다. 예수님은 무슨 나쁜 일을 하였는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무지한 자들을 말씀으로 깨우시고 소외된 자들의 친구도 하셨다. 그뿐 아니라 법은 죄 없는 사람을 판결하지 않는 것이 동서고금의 법칙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짓 정죄를 받으셨다. 빌라도 조차도 무죄를 확신하였지만 선동에 의해 정죄된 것이다. 옳은 것을 따라 바르게 살라고 하였던 예수님은 사형판결을 감당하셔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억울하게 사형 언도를 받아 십자가를 지셨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죄인들을 용서하고 화목하게 하시기 위한 지혜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모함받아 십자가를 지셨지만 흠 없던 하나님의 아들이 진노를 받아 죽임을 당하므로 구원받을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혜 있는 자들에게 감추어졌던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고 물었다. 하나님의 팔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인 것이다. 사실은 그분이 십자가를 지실 어린양이며 구원받을 우리에게 임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의 형벌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이 사형 방법의 중요한 특징은 사형받은 죄수가 사형받을 고통의 최대 고통을 끌어내는 것이다. 십자가 형벌은 대개 사형 언도가 주어진 후에 이루어지는데 두 가지 규례가 있었다. 하나는 채찍을 맞는 것이다. 채찍은 특별했다. 당시 이 죄수에게 다루어진 채찍의 모습은 아홉 가닥의 채찍 끝에 금속 부착물이 있었고 내리치면 살점이 떨어졌다. 두 번째는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이고 가야 했다. 약 150~180kg이었다. 가시면류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야 했다. 두 손을 나무에 박고 세로 막대를 세우고 도르래를 이용해 가로 막대를 들어 올렸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것이다. 많은 살마들이 예수님을 뒤쫓았다. 당시는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모였으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인지가 뉴스거리였던 것이다. 물 위를 걷던 예수가 자신을 위해서도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은 이미 기력이 없었다. 그래서 가시는 길에 계속 쓰러지셨을 것이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기 전부터 과정을 생각해 보자.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보내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사랑하던 제자에게 배신당하셨다. 심문당하셔서 빌라도에 끌러가셔 헤롯에게 끌려가시고 빌라도에게 끌려오시고 구타당하시기까지 하셨다. 밤새도록 그 고통을 당하시고 재판을 당하셨다.

 

왕궁 수비대에서 수많은 군병에게 조롱당하시고 벌거벗기셨고 채찍을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셨다. 십자가를 지시다가 계속 주저앉으셨다. 억지로 지신 것이었다.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사랑해서 진 것이 아니었다. 이후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헌신하여서 인도에서 순교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 항상 기뻐하는 것만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때도 있었다. 주권적으로도 쥐어 주시는 것이다. 사람이 깨닫는 것이다. 억지로 받은 집사 직분 때문에 떠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봉사하다가 하나님을 만난다.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예수님이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많은 사람이 따랐다. 그 사람들은 남녀모두 섞여서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이다. 첫 번째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보고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방관자로서 구경하며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오르실 때 구경하면서 따르는 구경꾼이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설교를 들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리떡을 먹이실 때에 거기에 함께 있어 주린 배를 채우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질병에 걸렸을 때에 고침 받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뭇가지를 흔들며 외치던 무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싸늘한 마음으로 피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예수님이 어떤 잘못이나 과오가 있었나? 그분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을 버리고 낮고 낮은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 세상을 창조하셨던 분이었어도 구유에 누워 이 땅에 오셨다. 결핍과 고난에 생애 이셨다. 허드렛일로 30년을 보내셨다. 가난과 굶주림으로 보내셨다. 고달픈 생애였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목마르셨기 때문이셨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무슨 나쁜 짓을 하였는가? 의사가 되셨으며 선지자도 되셨고 고독한 자들에게 친구가 되셨다. 티끌만큼도 당신의 생애가 아니셨다. 액체의 생애셨다. 땀 흘리셨던 생애셨다. 휴식도 없이 고단한 연대기였다. 병든 자들과 주린 자들을 먹이셨다. 섬김의 생애셨다. 눈물의 생애셨다. 통곡과 눈물로 생애를 보내셨다. 신앙이 무엇인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앞에서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다.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산 죄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산 모든 날들이 고통과 시련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나를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엎드려 이제는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신앙의 시작인 것이다. 오늘 주님 앞에 모인 우리들을 위해 살을 찢고 죽으신 십자가의 그분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있는가? 1907년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나기 전에 1904년 인도에서 큰 부흥이 있었다. 존 스토드 목사가 방문한 적이 있다. 골목에 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선교사 물었다. "왜 울고 있니?"라고 물었다. "아저씨, 우리가 우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아 울고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육체의 수많은 유혹과 정과 욕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생각하자. 흠도 티도 없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찢겨 고난을 당하시고 옆구리에 창을 찔려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그것이 이 세상의 죄악 때문인 것이다. 오늘 이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짊어진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의 냉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이다. 주일날 예배에서 감격을 간직하는 교인이 얼마나 될 것인가? 진정으로 깨닫는 자들이 아닐 수 있다. 이 백성들을 보십시오. 병든 자가 일어나고 치료하시는 것도 보았고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보았다. 보리떡으로 먹이신 것도 보았다. 산상수훈도 들었다.

 

놀라운 경험이 영혼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를 위한 것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진정한 회개가 이 시대에 있는가? 부자일 때도 아니며 고생할 때도 아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할 때이다. 이천 년 전 고난의 아픔이 스며들었을 때 신자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백성들에게는 없었다. 아주 차갑고 냉담한 마음으로 고난당한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 달 때는 담고 쓸 때는 뱉었다. 두 번째는 여자의 큰 무리였다. 이들 중에는 갈릴리로부터 내려오는 이도 있었다. 칼빈 선생은 "이 여자들도 부활하실 것은 몰랐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울부짖으며 따랐다. 예수님이 홀로 되셨을 때 제자들 조차 살기 위해 도망갔을 때도 이들은 통곡하며 따랐다. 피투성이가 되셨어도 여인들은 통곡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도 이들은 더 슬프게 통곡하였다. 그들의 울음소리는 핏빛 통곡으로 바뀌었다. 이 차이는 무엇인가? 이 여자들은 더 큰 기적을 보았기 때문인가? 차이는 오직 하나이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 여자들은 묻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뿐이었다. 만일 내가 대신 지을 수 있다면 대신 지고 싶다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사랑의 차이가 이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강도들과 같이 치욕스럽게 당 아시는 것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예수님과의 추억도 생각해 내었을 것이다. 버림받았던 나에게 오셔서 섬기시더 것, 무지하신 나를 감미로운 목소리로 가르치시는 모습들과 발을 씻기시던 모습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모든 섬김의 동기는 사랑인 것이다. 주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 구경하며 따라갈 수 없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내 십자가이며 그분의 고난도 내 고난이고 그분의 죽음도 내 죽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였던 정신은 종말과 십자가 정신이었다. 일사각오의 신앙인 것이다. 물질의 풍요로움과 경제적인 번영 속에서 선조들의 본질과 멀어지지 않았는지 되물어봐야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이 있는가? 고난과 천대의 길을 가셔도 우리는 따를 수 있는가? 이 여인들은 예수님을 충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통곡할 수밖에 없던 광경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고난의 정신으로 교회 한 구석에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골고다 언덕이 가까이 오면서 더욱 슬피 울었지만 예수님은 못 박히셨다. 그 친절한 손은 못 박히시고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박혀 피가 온 얼굴로 흘러내렸다. 갈릴리 유대땅 사마리아까지 다니시던 팔에는 뼈가 드러났다. 그분의 심장은 옆구리로 들어온 창에 의해 폐를 관통당하셔서 터졌다.

 

요한이 예수님의 피와 물이 다 흘렀다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였고 모두를 사라지게 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 흔적은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삶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경꾼이며 어떤 사람은 눈물 흘리며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 오래도록 지속되는가? 지나온 생애는 우리가 잘 몰랐기 때문에 철없었지만 이제는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모퉁이에서 피 묻은 그리스도의 손을 붙들고 그분이 엎드리신 자리에 우리도 울고 섬기다가 죽으신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가자. 이게 바로 예수님 만난 사람들의 신앙이다. 이겨나가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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