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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5절
4절 전반부 설명이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다. 말씀이라는 말을 예수로 바꿔서 읽어보자. 예수님은 과연 그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이 모여들게 하는 것일까? 2000년 동안 그의 이름을 많이 부르는 자들이 생겨날 수 있는가? 아무리 진리가 위대하여도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치진 않는다. 없다. 예수. 그가 죽어서 무덤에 갇혀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있었을까? 저희 부모님은 이북에서부터 예수를 믿었다. 그래서 저는 행운아였다. 찬송가와 기도소리를 들었다. 환경이 기독교적이었다. 하루에 2번씩 가정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이성에 눈을 뜨고 성숙해졌을 때 질문이 던져졌다. 그분을 경험해 본 일이 없었다. 안 믿으면 집에 못 들어가서.. 교회는 너무 재미있었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과연 살아 계시는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3가지 질문이 있었다. 재수를 한 것도 축복이었다.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했다. ccc라는 학생 수양회에 참여하였다. 겉으로는 예수를 잘 믿었던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을 뚜렷하게 보았다. 회의와 갈등과 크리스천 가정에 있었지만 어느 날 새벽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격은 정말 생생했다. 무려 30년 전이지만 말이다. 피 묻은 손으로 와서는 "너를 2000년 동안 기다렸다. 너를 사랑했노라." 그 사건은 너무나 선명했다. 회개가 되었다. 주님 안에서 녹아졌다. 의심하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셔서 축복해주길 바란다. 확실하게 믿게 된 계기였다. 두 번째 확실하게 만났던 기억은 대학 3학년 때이다. 예수에 미쳐 살았다. 낮이고 밤이고. 전도하는데 대학생활을 바쳤다. 밤늦게 전도하고 만원 버스 속에서도 만나기만 하면 사 역리에 대해 얘기하며 못살게 굴었다. 폐 병에 걸렸다. 한 학기 휴학했다. 치료를 받는 밤 1시에 성경을 아주 많이 읽었다. 인생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읽는 때가 있다. 그런 때에는 미치도록 읽어야 한다. 어떤 때는 안 읽어지는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성경이 내 마음에 밤이 맞도록 읽을 때가 있다. 그때가 있기를 바란다. 한 문장 한 문장이 폭포수 같다. 밤 1시에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고. 비정상 같았다. 아주 뚜렷한 환상에서 문을 여시고 찾아오셨다. 문을 두드리셨다. 비 오는 날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나가서 모셨다.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이셨다. 푸른 초장으로 변하였다. 보따리에는 "내가 너를 사랑해."라고 적혀있었다. "네가 나를 위해 종이 되지 않을래?" 그래서 목사가 되었다. 어머니도 꿈을 꾸었는데 다짜고짜 와서는 "너 목사가 되어라."라고 하였다. 어느 날 군대에서 폐 병이 찾아왔다. 의병제대를 하였다. 나와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했다.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요즘은 주님이 직접 나타나지는 않으신다. 말씀으로 주신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날마다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은혜를 주시는 주님. 설교하는 중에도 역사하신다. 회복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람을 변화시키신다. 주님이 그때 거기를 지나갔구나. 거기를 지나갔구나.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만질 수 있는 주님보다 만지지 않아도 확실하신 주님. 온누리교회를 이 만큼 성장시키신 분은 주님이다. 곳곳에 계신다. 설교할 때마다 주님이 계신다. 저는 이 사실을 믿는다. 직접 목격했던 예수님. 격려해주신 예수님 보다도 확실하게 우리 가운데 계신다. 감당하는 많은 일을 겪을 때 거기 계셨다. 하나님은 부모와 같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습관적으로 믿었을 때는 관념적이었다. 모든 것은 형식과 전통이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 건 아니었다. 내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만난 것이다. 그분이 먼저 사랑하셨다. 그분은 실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다. 인간 예수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만 구원을 주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흠모할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다. 태초부터 시작한다. 예수의 기원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시작한다. 그는 실로 하나님이셨다. 인간 예수이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냐? 이 문제로 싸운다. 천국을 누가 아냐? 이렇게 자유주의는 얘기한다. 예수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남자의 씨로 예수님이 태어나지 않았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몹쓸 인간들은 예수님이 사생아라고까지 말한다. 남자의 씨로 태어났다면 그도 죄인인 것이다. 그가 신성이기에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 존재하셨다. 밤새도록 감탄할 지경이다. 붙잡을 수 없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나와 같은 죄인 안에 들어올 수 있나?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수님으로 보여주신다. 만질 수 있다.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다 보여주셨다. 그 하나님이 말씀으로 표현된 것이 기가 막힌다. 내 손에 잡힌다.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듯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난다. 그는 나를 붙드신다. 내 잔을 넘치게 만드신다. 시편에 살아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내 삶에 개입하신다. 설움과 한숨, 고통을 아시고 회복하신다. 인간적이며 실제적이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체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실체이다. 33년 동안 역사적 시점에서 사셨다. 부활 승천 오셔서 우리에게 계신다. 지금 이 자리에 마음속에 내 기도 속에 찬양 속에 거하신다. 이것이 찬양이다. 예배이다. 기도이다. 우리의 신앙은 허구가 아니다. 그 어떤 분과 매일 함께 있는 줄 믿는다.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자. 성경 하나면 족한 것이다. 오늘 저녁에 읽자. 그러면 예수님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과 말은 다른 것이다. 깊은 잠을 주신다. 우울한 나에게 기쁨을 주시고 복음으로 담대하게 하고 나를 내어 줄 수 있게 변하게 하신다. 설교를 계속 들으면 변한다. 듣고 또 들어라. 어린양 같이 순해진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능력 변화의 실체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2~3절을 보자. 예수님의 본질은 인간 이상의 존재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어야 한다.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하셨다. 함께 하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진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은 없느니라. 골로새서 1장 15~17절을 보자. 놀라운 얘기다. 예수님이 천지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만드신 것이다. 지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잘 아신다. 체질 약점도 아신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철저한 죄인임에도 교활함에도 나를 사랑하신다. 대부분 결혼도 모르고 한다. 어떤 사람은 50년 만에 깨닫는다. 다 숨겨놓는다. 그리고 늦게 아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정상적이다. 부부끼리 커튼 하나씩 끼고 산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예수님께 가면 치유하신다. 왜냐하면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생명이다. 4절을 보자.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이 인간을 만들고, 지구, 우주에 호흡을 불어넣었다. 창조는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생명은 죽음의 반대이다. 죄를 지은 인간은 죽음 위에 백성이다. 그림자 속에 산다. 외로움, 갈등, 고독, 죽음이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간다. 종착역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눈물을 쏟는다. 죽음 이후가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영원을 여는 문이다. 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람한테는 무섭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창조의 능력은 생명이다. 생명이 있으면 죽은 것도 살아난다. 죽은 나무와 사람이 살아난다. 생명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신 분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아가고 귀신이 떠나간다. 생명이시다. 하나님의 생명이다. 교회 오면 왜 예수를 믿으라 하는가?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생물학적인 생명만 가진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접붙임을 받아야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를 믿으라는 소리다. 예수 안에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 고리이다. 이 생명은 죽음을 깨친다. 절망 죄악을 깨친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으니.. 누구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한일서 5장 11~12절을 보자. 요한복음 11장 25절을 보자.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말은 부활의 핵심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것이다. 안심하자. 천국 가며 영원한 생명이 얻어지는 것이다. 이 생명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체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자. 예수님이 온 것은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유정란은 어미 닭 속에 들어가 있으면 생명이 된다.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영원한 부활이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다. 오늘 믿는다고 갑자기 변하지는 않는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오면 말이 달라지고 습관이 달라진다. 생명의 특징은 자라는 것이다. 성장이다. 열매 맺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나누어 준다. 예수의 생명이 있기에.. 예수를 믿자. 가짜 생명은 떠나가고 진짜 생명이 잉태된다. 특징이 생기는데 교회와 하나님 얘기에 좋아하게 된다. 뭔가 좋아진다. 성경은 잘 모르지만 좋아진다. 변화이다. 당신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영향력이 생긴다. 요한일서 1장 4절을 보자. 역사하실 것이다.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 한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두 번째는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인치심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아버지에게 받기까지는 떠나지 말라. 성령을 받으리라."라고 하셨다. 성령이 없으면 이곳에 못 앉아 있는다. 졸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계셔서 빨려 들어간다.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성령 충만이 다 이런 얘기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믿겠다고 말하자. 진리는 간단하다. 복잡하지 않다. 그냥 믿자. 그 이상 해답이 없다. 믿어지는 게 내 이성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부끄러워하지 말자. 성령님 나에게 오시 옵소서. 나를 충만하게 하옵소서. 어떤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자. 열매 맺기 위해 가는 것은 우리 일이다. 뿌리내리는 것이다. 그런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고기 논쟁
에스겔 11장 1~13절
하나님의 영광은 지성소에 머무르셨다. 9장부터는 본래의 자리를 떠나 이동한 것이다. 11장 23절에는 성읍 동쪽산까지 나아가셨다. 엘리 제사장과 사울 왕의 모습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간 모습의 대표적인 것 같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두에게 임하고 일터와 가정에도 임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삶의 하나님의 영광이 늘 임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은혜 베풀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자. 벌써 떠나가야 하는 영광이지만 이들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셨다. 굉장희 돌아보시고 떠나가시는 것이다. 또 머무르시며 환상을 보여주시며 설명하신다. 회복을 예고하신다. 길어지는 것이다. 저는 아파트 16층에 사는데 나올 때 아이들과 계속 눈을 마주치고 마음으로는 계속 사랑한다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하나님은 떠나신다. 그러나 떠나고 싶지만은 않은 것이다. 거절감이 아니다. 돌이키면 돌아온다는 것이다. 죄에서 떠나면 내가 돌아 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자. 의심하지 말자. 기억해야 한다. 사랑에 메시지를 기억하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너희를 싫다고 하지 않으신다. 사랑의 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돌이키는 원동력이 생긴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3절을 보자.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않다. 지금은 집을 건축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집들이 이렇게 많지 않은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힘들겠지만 우리에게는 기회요 축복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25명 정도가 끌려가지 않았다. 통치자였다. 이 위기에서 나를 고관으로 세우신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을 더 가질 수 있을까? 누릴 것인가? 그런 것만 기대하였다. 3절을 보자.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라고 하였다. 가마는 항아리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좋은 고기들을 고양이나 다른 짐승들이 건들지 못하게 항아리에 담아서 보관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항아리에 고기를 담은 것처럼 우리를 남기신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바른 지도자의 모습을 회복하여야 하는데 이들은 끌려간 이들이 죄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였으며 가난한 백성들을 무시하거나 비난하였다. 남겨진 집들과 권세를 자기 것이라고 여겼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다가 실수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욥의 경우 자녀와 재산을 다 잃고 있을 때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욥의 대답은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냐?"라고 하였다. 고난을 받았지만 나중에 더 복을 받았다. 또 기드온의 예도 있다. 미디안의 눈을 피해 포도주 곡식을 타작하는 입장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민족 가운데 새 일을 시작하실 것이다."라고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다. 자기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구원에 이르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고 만다.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가운데 있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니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실패와 절망 가운데 여호와의 권능이 임하여 현실 속에서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관점과 태도, 비전과 사명을 발견하는 것이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큰 능력이심이다. 세 번째는 나 자신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1차, 2차, 3차 침공 때에 전부 끌려갔다. 25명의 통치자가 남았다. 6절을 보자. 이 사람들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시체를 수습했다. 사람들을 벌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교만하게 행동하였다. 2절을 보자.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불의로 악한 꾀를 부리는 자로 여겼다. 자신들이 선인 것처럼 여겼다. 그들의 속 사람은 불의를 품고 악한 꾀로 가득 찼음을 보았다. 사람들의 두뇌는 사실 참 허접하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해도 고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피하기 위해서 조작된 생각을 집어넣는다. 교묘하게 상황을 바꾸기도 한다. 이것은 거짓말과는 다른 것이다. 거짓 기억이 되어 자신의 논리가 되어 강화하는 것이다. 고집이다. 백성의 고관들도 예루 살렘에 상황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합리화했을 것이다. 이상한 논리로 발전한 것이다. "내가 고기다. 바로 내가 고기였었다. 나를 사랑하셔서 이 자리에 남겨 놓았다. 저 비천한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다. 누리는 것이 죄가 아니다. 착취하는 것이 대의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 안의 거짓된 자아를 들어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이 시대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이다. 이 시대의 기드온, 에스겔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해석하자. 내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자. 하나님의 영광이 가정과 교회와 민족 가운데 회복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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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3일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아반떼와 충돌해 사망했다. 오토바이 탄 사람이 중국집 배달원인데 왜 뉴스에 나왔을까? 돈 얘기가 아니었다. 호상이 최불암이었다. 기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곧 깨끗이 잊었다. 그런데 윤 집사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이 사람 얘기를 추적하여 감동을 받고 영화를 만들었다. 철가방 우수 씨였다. 김우수라는 이 분은 태어나면서 성당 앞에 버려졌다. 고아원에서 자랐다. 완전히 버려진 사람이었다. 12살 때 서울로 도망쳤다. 12살 꼬마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배 채우기가 어려웠다. 거짓말도 하게 되고 전과 3범이 되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분노와 저주로 살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음식점 풍경을 보게 되었다. 연인, 가족, 친구를 보고는 뚜껑이 열렸다. 휘발유를 뿌렸다. 다 죽이고 나도 죽겠다. 감옥에 갔다. 전과 4 범이다. 잡범은 감옥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살인범 정도 돼야지 대접을 받는다. 사형수들은 장군처럼 걷는다. 그런데 이 분은 잡범인데도 독기가 있어서 건들지 못했다.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오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배달을 했다. 한 달에 70만 원을 받았다. 고시원이 15만 원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15만 원으로 5명의 아이들을 후원했다. 장가도 가고 노후도 걱정해야 하는데 생활비 전체를 털어 섬긴 것이다. 그래서 이 분이 기부천사라는 말을 들었다. 매달 후원했다. 여려해를 말이다. 그럼에도 너무도 인생을 즐겁게 살았다.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어느 날 자기 옆에 잡지가 떨어져 있었다. 월간 사과나무였다. 잡지 뒤쪽에 중학교 남자아이 편지가 실려 있었다. "아니 여기에도 고아가 있네." 앞으로 불쌍한 인생길을 살아갈까 하니 측은했다. 중학생인 고아가 여동생 2명도 있었다. 안타까웠다. 막네 여동생 지연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해야 하는데 예쁜 가방을 사줘야 되는데 돈이 없다. 글을 보고 간수에게 부탁했다. 12만 원을 재단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간수는 어이없었지만 보내줬다. 그의 마음에 그 아이들을 위해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답장이 왔다. "아저씨가 보내주신 돈으로 지연이의 입학식을 잘 치렀습니다. 가방을 사줬는데 그 가방을 메고 다닙니다. 잘 때도 그 가방을 메고 잡니다. 웃으면서 잡니다. 내 동생을 웃게 해 준 아저씨게 너무 감사합니다." "나한테도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니."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그의 책상에는 성경이 있었다. 시편 23편이 펼쳐 저 있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김우수라는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 남아 있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기뻐하였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의미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긴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 이루었다." 값을 다 치렀다고 하셨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손에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며 죄의 값을 치르시고 생명을 다시 찾으시는 것이다. 죄를 이기고 죽음을 이기는 자리로 나아오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버트런트 러셀은 "자기 아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기에 나는 믿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오해한 것이다. 내 마음대로 살아가 보겠다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무기력함이 십자가의 참혹함인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그 인간의 참혹함이 예수님이 십자가의 달린 참혹함인 것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을 새롭게 희망으로 세우시기 원하신다.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의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사회에 희망이 되는 꿈을 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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