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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2 월새벽예배

Q.T/수영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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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에서 멀리하라!

에스겔 8장 1~18장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 때문에 실수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는 하루에 술로 인해 13명이 사망하는 나라이다. 의사가 경고를 하나 중독된 사람은 듣지 않는다. 의사가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할 때와 같이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우상숭배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다. 첫 번째는 유다 백성들이 우상 숭배하는 환상을 보게 된다. 네 가지의 우상숭배이다. 두 번째는 유다의 사회적인 죄악을 보게 된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첫 번째 우상숭배는 질투의 우상이다. 질투의 우상을 보게 되면 이것은 풍요의 여신이다. 아세라의 형상이다. 아세라가 세워진 곳은 수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장소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그 앞에 절을 했다. 평소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무조건 "복을 주신다."라고 잘못 알았다. 하나님은 성소를 떠나가셨다. 임재가 충만한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지는 않았는가? 에스겔은 충격을 받았다. 성소에서 우상 숭배가 있다니.. 하나님은 다른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성벽을 헐라고 하셨고 에스겔은 그 문으로 들어간다. 각종 우상의 모습들을 벽에다 그려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장로 70명이 그림을 그려놓고 분향을 해놓고 제사하였다. 방에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숭배했다. 하나님은 환한 빛 가운데 다 보고 계셨다. 에스겔은 성전 북문으로 이끌렸다. 여러 무리의 여인들을 보게 되었다. 단 무스 신을 향하여 애곡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농경을 통치하는 신이다. 물질적인 풍요를 기대하는 것이다. 혼합주의 사상이다. 우상숭배이다. 네 번째 우상숭배는 성전 안뜰에 있다. 25명의 사람들을 보게 된다. 태양을 향하여 경배하는 모습을 보았다.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단 옆에 있었다. 이 사람들은 제사장이었다. 성소를 향하여 등을 지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모습인 것이다. 극한 반역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았다. 또 하나는 사회적인 죄악과 연관이 있음도 보여주셨다. 폭력으로 피를 흘리며 이웃에게 해를 가했다. 하나님은 영적인 타락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죄악에도 관심을 주시고 용납하지 않으신다. 불의이다. 심각한 죄악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관계가 깨져있으니까 일어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이다. 18절을 보자. 하나님은 우상숭배와 죄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들으신다. 죄악 때문에 귀를 닫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귀를 막으셨다. 에스겔 8장에서는 계속 반복되는 것이 있는데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볼 것이다." 세 번이나 반복하셨다. 이유가 있다. 유다의 우상숭배는 성전까지 장악된 우상숭배이다. 보통은 산과 들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성전 안까지 오염되었다. 지성 소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거룩해야 하는 것이 이치이다. 그러나 죄악 된 것으로 흉물스럽게 변한 것이다. 유다의 우상숭배는 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유다의 세 종류의 사람이 우상숭배에 뛰어들었다. 백성, 장로, 제사장들이다. 지도자들이다. 일반 백성보다 지도자들이 먼저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권면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상숭배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존경받는 사람이 큰 죄악에 빠져있다. 이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설교이다. 왜냐하면 저부터 우상숭배를 비추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21세기에도 피해 갈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 21절을 보면 "우상에서 멀리하라."라고 하였다. 내면에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것이다. 팀 켈러 목사는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근본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우상이다."라고 하였다. 우상은 하나님을 몰아낸다. 전쟁한다. 마음속은 우상의 전쟁터이다. 기도하는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다. 돈, 쾌락, 자식, 자아라는 우상에 무릎 꿇고 자라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지 본질이 아닌 것이다. 스마트폰도 우상이다. 핸드폰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 우상을 몰아내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나님은 예배와 헌신을 온전히 받기를 원하신다. 우상은 가짜이며 허무이다. 우상을 섬길수록 허무하게 되어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너 잘한다. 훌륭하다. 손뼉 치지만 가증한 일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을 보리라~"하심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아름답게 쓰임 받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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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5 주일예배 봉헌

성가 찬양대/로마연합교회 찬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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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길을 걸어갈 때

외로운 시험당할 때

 

주께 맡기네 주 의지하네

나를 만져주시네

 

어두운 세상 살아갈 때

절망 속에 넘어질 때

 

일으키시네 채워주시네

나를 인도하시네

 

주는 구원자 주는 위로자

온 세상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어둔 세상 밝히시네

쓰러진 나를 세우시네

 

거룩한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거룩한 주 품 안에

 

주는 내 목자 나는 주의 양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주

 

어둔 세상 밝히시네

쓰러진 나를 세우시네

 

거룩한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영원한 주 품 안에 영원한 주 품 안에 영원한 주 품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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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1 주일예배

Q.T/수원송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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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사람마다 인생의 전환점이 있다. 사람마다 몇 번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제 인생에 있어서 중학교 2학년은 특별했다. 은혜받고 기쁨을 경험했었다. 그 밤에 은혜받고 나무 잡고 기도했었다. 또 하나는 다니던 교회를 떠나는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이후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교회를 개척하셨었고 부교역자로 일했었다. 저에게 인생 전환의 시점에서 가장 빠른 타임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다윗에 생애의 전환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최상의 환경을 찾았지만 국가적 망신을 당하면서 최악의 상황에 빠지는 부분이 있었고, 최하의 환경이지만 고독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왕으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부분이 있었다. 두려움의 옷을 벗기를 바란다. 그의 내면에 하시는 말씀이 있다. 다윗에게 요구하는 것도 있다. 사실은 같은 한 가지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라!" 개인의 모든 가정들이 납작 엎드리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첫 번째는 다윗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자.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쟁자인 아기스에게로 갔다. 그의 두려움은 증폭되고 있었다. 심리적인 궁지에 몰리면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잘못된 결정도 내린다. 이스라엘 안에서 벗어나 사울이 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의탁을 하면 용병으로 받아주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다윗이 가드로 도피를 한 것은 실수였다. 아기스 왕의 신하들은 그를 비난했다. 다윗을 너무 잘 알았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했다. 그래서 미친 척을 했다. 목숨이 달렸기 때문이다. 아기스 왕은 속았다. 다윗의 승리였다. 가드 땅을 잘 빠져나왔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묻고 인도함을 받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묻는 것은 빼놓지 않고 하여야 한다. 또한 두려움이 우매하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것은 우매한 행동인 것이다. 전도서 7장 7절에는 "탐욕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한다"라고 나와있다. 두려움에 압박이 시험 들게 한 것이다. 더 심한 두려움을 맞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거저 주시지는 않는다. 지혜를 주실 때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의 역사를 완성시켜 주시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할까? 사명자의 삶이 있는 것도 아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세상 앞에서도 자존심 세워야 하는 일도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필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이 아기스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생명이 거두어졌을 것이다. 지난 주일 10년 만에 오신 성도에게 전화를 짧게 걸어 얘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계속 나오실 여부를 물었을 때 "저의 본 교회는 송원교회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모든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음을 느꼈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신앙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다. 상처 준 사람이 떠오르고, 모욕을 준 교회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정서적으로 계속 영향을 주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의지한다면 사람을 의지하고 있는 신앙이 맞다. 하지만 누군가 상처를 주어서 내가 하나님에게 엎드리지 못하면 이 사람도 역시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 관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고 엎드린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아기스를 속일 수 있었겠는가? 시편 34편에는 자존심을 다 내려놓은 구절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두려움이 엄습할 때 납작 엎드렸던 것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자. 다윗처럼 고백하자. 다윗이 아둘람 굴로 갔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알 수 있다. 이 은신처에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는가? 샘이 솟는 물이 있었고 그렇지만 오랜 시간 머물 수는 없었다. 스펄전 목사님은 기도를 위한 골방이라고 표현하였다. 아둘람 굴에서의 기도는 시편 142편과 57편에 기록되었다. 다윗이 여호와께 집중하는 모습이다. 다윗은 영혼이 상함 가운데 있으며 올무가 있는 것을 얘기한다.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이 아둘람 굴의 캄캄함과 같지만 "주는 나의 피난처시며, 분깃이시라." 시편 142편과 같이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사울에게서 떠난 이들이 다윗에게 찾아왔다.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이들인 것이다. 아둘람 굴이다. 경제적으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이셨다. 400명가량이었다. 사람의 숫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빼고 나온 것이다. 600명가량이 되었을 것이다. 시글락이라는 땅을 받았다. 이들과 새로운 시대를 열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되었다. 이들은 양식 구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5만 번의 기도응답을 받았던 조지 물러 처럼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그 공동체가 굴 안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다윗이 하나님에 말씀으로 조언하고 문제에 해결책을 권면했을 것이다. 공동체 안에 하나님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편 57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 있다. 고백하였다. 다윗은 실제로 세상의 영광과 권세는 없지만 하늘의 놀라운 보화를 받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필두로 공동체가 세워졌다. 다윗이 계획한 것이 아니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비결은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고 말씀이 역사하는 것이다. 비결이다. 병들어 죽지 않은 것은 공동체였기 때문이며 말씀으로 인도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아둘람 굴과 같이 사람을 피할 수밖에 없고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신앙을 갖춘다면 놀랍게 역사하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곳에 수많은 영혼이 있기 때문인 줄 믿는다. 새 주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하여 주실 줄 믿는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의 신앙을 가진 이들을 사용하고 맡기심을 얘기하신다. 교회는 아둘람 공동체로 쓰임 받아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성령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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