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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에 감춰 진 비밀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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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의 시대, 모든 것이 넘쳐흐른다. 결핍의 문제보다 풍요로 일어나는 문제가 더 많다. 사람들은 포만감에 시달린다. 더 채워 달라는 육체적 본능이 보채는 대로 따라가면 위험하다. 육체적 선동에 휘둘리면 감각이 망가지고 영적 파산에 직면하게 된다. 금식은 육체의 요구에 대한 일시적인 저항이다. 육체의 욕구를 종종 통제함으로 영혼의 파리함을 막아야 한다. 움켜쥠으로 만족이 아니라 비움을 통해 채워지는 경험이 금식이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일시적으로 차단함으로 잃어버린 영적 미각을 회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게 한다.

현대인들은 욕구에 끌려다니기 급급하다. 제어장치가 허술해 쉽게 무장해제된다. 육체적으로는 기름진 상태이지만 영적으로는 화전민 수준의 신자들이 늘어난다. 육체적 배부름은 영적인 부요함과 멀어질 위험성이 높다. C.S 루이스는 "우리는 최상의 소유는 결핍이다"라고 했다. 먹음으로 채워지기보다 비움으로 채워질 수 있다. 먹어야 힘을 얻는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찮은 것 때문에 위대한 것이 자리할 공간이 없어질 때가 많다. 일상의 산만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영적 몰입도가 높아지면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이 일어난다.
금식을 통해 내면에 깊이 숨겨져 있던 것들이 드러나야 잃어버린 중심을 되찾을 수 있다.

금식의 형태들은 다양하다.
1) 물만 먹는 금식이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 물만 먹으며 비교적 긴 기간 할 수 있다.
2) 음료 금식이 있다. 다른 음식은 먹지 않고 과일주스와 같은 가벼운 음료만 마시는 금식이다.
3) 에스더 금식은 음식은 물론 물도 먹지 않는다.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인데 3일 이상은 위험하다.
4) 다니엘 금식이 있다. 씹는 것은 피하고 가볍게 갈아서 마시는 수준의 금식이다.
5) 부분 금식이 있다. 음식은 먹지 않고 야채와 견과류 같이 가벼운 것만 먹으며 하는 금식이다.
6) 베네딕트 금식은 유럽의 수도사들이 주로 행했던 금식인데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금식이다. 그들은 금식을 통해 강한 육체와 함께 강한 영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7) 말의 금식이 있다.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의 금식도 유익하다. 말을 많이 하면 경건에 마이너스가 될 때가 많다.
8) 비판하는 영의 금식은 정죄와 판단을 멈추는 훈련이다. 방심하면 무수하게 정죄와 비판을 쏟아내며 살아간다. 비판은 영적으로 해롭다. 비판이 습관화되면 부정적인 영이 지배하게 된다. 사람들을 축복하기보다 공격적인 삶을 살게 된다.
9) 문화적 금식은 오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중요한 요인이다. 인터넷, TV 등, 미디어들로 영적 난청 현상이 벌어진다. 미디어 금식만으로도 영적 고출력을 경험할 수 있다.

금식은 광야의 경험이다. 자발적으로 불편을 선택하는 일이다. 금식의 과정에서 자기 부인을 하게 된다. 금식은 단순한 삶으로 이끈다. 금식을 통한 영적 집중력은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든다. 금식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친밀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한 경우, 비상적인 순간 금식기도를 할 수 있지만, 평소에도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위해서 금식할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특정 음식이나 행동 중에서 절제하거나 금식하기에 너무 힘들지 않은 것 하나를 정해서 실천을 옮겨 보면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부담스럽지만, 금식을 통해서만 누리는 영적 즐거움과 비밀이 있다.

존 파이퍼는 "금식이란 세상 최고의 먹기보다 하나님의 천국 잔치를 즐기겠다는 주기적인 선포다"라고 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적절히 향유해야 하지만 때로는 그런 것들을 거부함으로 방종의 유혹을 이겨내고 영적 무감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더 깊이 갈망할 수 있다면 축복이다. 먹지 않고 힘을 뺄 때 잃어버렸던 영적 감수성이 회복될 때 하나님과의 사랑의 불꽃이 일어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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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9 월새벽예배

Q.T/수영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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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예언에서 돌이키라

에스겔 13장 1~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미래에 소망과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당장 내 귀에 듣고 싶은 말과 힘이 되는 말씀만 듣고 싶어 한다. 어쩌면 그런 말씀들이 오늘 새벽에도 들리기를 바란다. 그러나 말씀 중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오늘 당장 그런 말씀들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을 예고한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불편하고 힘들다. 누구의 잘못인지의 여부는 사람들에게 중요치 않고 당장 힘든 게 중요하다. 어디서부터 온 것이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지금 이 상황이 힘들고 짜증 날 뿐이다. 심판의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긍정의 말과 좋은 소리, 회복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상황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렇기에 내가 잘못한 것과 이유의 대해서 듣기보다는 회복의 말씀을 듣기 원한다. 그러다 보니 아첨과 거짓 점괘를 말하는 예언자에 말을 주목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해결도 관심이 없다. 좋은 말과 상황을 원한다. 듣기 불편하고 거북한 말은 삼켜버리고 자기 마음대로의 축복된 말에만 귀를 기울였다. 7절에는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들이라 지칭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위로에 말은 듣기에는 좋아도 허탄하고 거짓된 점괘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좋은 말을 해달라고 떼를 쓸 수 있다. 10절을 보자. "그들이 회칠하는 도다." 위기상황에서 거짓된 평화를 선포하는 것이다. 애통하고 회개하며 돌아오기는커녕 거짓으로 백성의 눈을 어둡게 하고 다른 길로 걷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 선지자의 직무이다. 죄악 가운데 머물게 하였다. 담을 쌓는다는 것은 견고하게 쌓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벽이다. 거기에 그럴듯하게 칠을 하는 것이다. 거짓을 예언하는 자들이 아첨하고 문제들을 모조리 감추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기상황에서 이들은 평강의 말씀만 선포하였다. 사람을 무서워했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안전과 안위를 우선하였다. 우리가 당장 처한 위기상황 가운데 부정함과 죄악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 축복의 말씀만 추구한다. 이것이 아니면 힘들어하고 불편해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하나님은 경고하시는 것이다. 좋은 것을 좋은 것대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하신다. 13절을 보자. "내가 폭우와 우박으로 무너트리리라."라고 하셨다. 우리의 상황 가운데 고통과 절망 어려움의 배경에 우리의 음란과 거짓과 우상이 있는데 그것을 덮어 놓고 평강만을 바라는 백성과 선지자의 선포를 경고하는 것이다. 기초와 담이 무너진다는 것은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다. 오늘 성경은 계속해서 그런 말씀의 연속이다. 점쟁이들과 비슷한 행동으로 백성들을 사냥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도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내가 내 백성을 건져내리라."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인지 알게 하시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 때문에 하나님에 백성에게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축복만 듣고 싶어 하는 것이 한국 교회가 아닌가? 듣고자 하는 메시지만 듣고 싶어 하는 성도들. 하나님의 말씀은 불편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 가운데 불편함으로 다가와야 정상인 것이다. 듣고 싶어 하는 말씀만 오로지 듣고 싶은 것에서 돌이키자. 나에 거짓된 추악함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용서함을 받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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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7 토새벽예배

Q.T/수영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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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본심

에스겔 12장 1~16절

 

자녀를 키우다 보면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잘 몰라준다. 아이들을 위해 밥을 준비하면 밥상 앞에서 먹지 않고 멀뚱멀뚱한다. 그러면 밥 먹지 말고 굶으라고 하지만 속마음은 진심이 아니다. 밥을 안 먹는 아이를 보며 안타까워한다. 자녀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신다. 모든 관심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만 사랑해야 할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걸 보고 분노하셨다. 반역하는 족속 아라고 하셨다. 출애굽기 19장 5절을 보자. "너희가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족속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장 귀한 보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역하는 족속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의 상태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는데 듣지 못한다 하였다. 같이 앉아서 얘기해도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듣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도 마음에 걱정과 근심이 가득 차 있으면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그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껍데기만 나오는 너희들을 봐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듣고도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사랑의 매를 들 때가 있다. 말을 듣지 않을 때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특별한 행동을 하라고 하셨다. 대 낮에 짐을 밖으로 내다 놓았다. 벽에 구멍을 뚫었다. 지금처럼 단단한 벽이 아니었다. 태양에 구운 흙벽이었다. 벽돌을 뺄 수 있었다. 짐을 들고 떠나는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궁금해서 물으러 오기 때문이었다. 물으러 오면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느브갓네살이 시드기야에 아들들을 다 죽였다. 두 눈도 뽑아 버렸다. 바벨론 땅으로 끌고 가다 시드기야가 죽는다. 그리고 그 땅을 보지 못하였다. 두 눈이 뽑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시드기야에게 내린 것이었다.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살펴야 한다. 3절을 읽자. 반역하는 백성이라도 깨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녹아있다. 16절에서도 '그러나'라는 접속부사를 넣었다. 심판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기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였다. 본심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다. 변함없이 사랑하신다. 우리의 상태와 상황은 상관치 않으신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며 쫒아 오신다. 죄를 지어 숨어도 찾아오신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가?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그분에 사랑 때문이다. 그분의 본심 때문이다. 프레시스 톰슨이라는 시인이 있다. 자신이 원래 하는 일들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방황하다 결국 마약에 빠졌고 런던 빈민굴에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주님의 추적을 느꼈다. 피하고 또 피했다. 결국 주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도 썼다. 죄악으로 가득 찬 우리를 볼 때는 소망이 없다. 죄 덩어리인 우리를 버리셔도 할 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처음부터 사랑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긍휼의 마음과 사랑이 우리를 붙드는 것이다. 에스겔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지만 주님은 추적하시겠다고 하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할 거라고 얘기하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본심이다. 이사야 49장 15절을 보자.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잊을 수 없다. 엄마는 반드시 그 자식을 찾는다. 혹시나 엄마는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지라도 주님은 잊지 않으시는 것이다. 오늘만큼은 주님 앞에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마음 알아드릴게요. 어떤 마음 때문에 슬퍼하십니까?"라고 고백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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