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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 18~23절
우리가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책망을 여러 번 하셨다. 믿음이 작은 것에 대해 책망하셨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왜 염려하느냐." 제자들이 믿음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후에 다 도망하였다.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고 저주까지 하였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들었을 때도 미지근하게 반응하였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셨을 때도 미지근하였다. 주님이 살아서 오셨는데도 가만히 있겠는가?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임을 여러 번 얘기하셨었다. 제자들은 기뻐하지도 감동하지도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물고기 잡으러 떠났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들의 사명을 다시 확인시켜주셨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네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 38~39절을 보자. 반드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양인 것이다. 이것이 제자들의 사명인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는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직장에서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살림하다가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 복된 사람은 주님의 일에 충성하다가 맞이하는 자인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44~46절을 보자.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신령한 말씀을 가르치고 같이 은혜받으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제일 복 있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주님의 사명을 열심히 하다가 보면 자신의 신앙이 건강해진다. 장차 받을 상급도 크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결심을 하여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양들을 인도해야 한다. 로마서 8장 17~18절을 보자.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머리로는 잘 안다. 실제로는 복음을 위해 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첫째로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과거에 집착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뭘 그런 것을 하노?"라고 생각한다.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물고기나 잡을 생각만 하였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주님을 위해 나설 용기가 사라진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현재를 보시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는가? 매이지 말아야 한다. 에스겔 18장 21~23절을 보자. 아무리 죄를 범한 악한 인간이라도 돌이키면 그 사람의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얼마나 우리에게 소망이 되고 축복과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돌이키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누가복은 15장 11~24절을 보자. 우리가 돌이켜서 주님 앞에 나올 때 과거를 보지 않으시는 것이다. 돌이키는 그 모습만 보시는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도 돌이키면 산다. 누가복음 15장 7절을 보자.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과거에 절대 매이지 말자.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어제에 우리도 보고 있지 않으시다. 지금에 나를 보고 계신다. 믿음으로 사는 것 같은데 주님의 복음을 위해 나서지 못한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어서 그렇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못해서 그렇다. 많은 박사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불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다. 확실하게 기도하지 못한다. 성령의 불을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있을 때 "나는 이렇게는 못살아."라고 하면서 불광동 산에 올랐다. 아예 벼량 끝에 앉아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틀이 지났다. 억울해서 못 내려갔다. 화요일 밤에는 절벽 끝에서 "오늘 밤에 끝장낸다. 떨어져 죽든지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불은 안 주시고 물벼락을 주셨다. 소나기가 억수같이 내렸다. 완전히 내복까지 다 젖었다. 기도하다가 화가 났다. 달라는 성령의 불은 안 주고 물벼락을 주셨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였다. 부르짖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이 임했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해가 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지 계산하기 어려웠다. 목도 완전히 쉬었다. 수요일 집회 때 성도들이 알아보았다. 성도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일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복을 많이 받았다. 우리에게도 큰 문제가 있는데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미지근하게 평생 살 것인가?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보자. 어떤 문제이든지 기도하다가 은혜받은 간증과 주님 만난 간증과 인생이 완전히 바뀐 간증이 있어야 한다. 왜 간증 거리가 없는가?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지 않는다. 휴대폰과 시계도 보지 말자. 금식하며 기도해보자. "이번에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라는 각오로 기도하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면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 18~19절을 보자. 베드로가 죽음으로써 영광 돌리게 됨을 말씀하신다. 더 이상 한 눈 팔지 말고 목숨 걸고 충성하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처럼 충성하라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가장 강해지는가? 목숨을 걸 때이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보자.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큰 일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공군 군목으로 있을 때 부대를 섬겼다. 전 장병을 믿게 만드리라는 뜻을 품었다. 매일 기도하였다. "내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밝혀 죽었는데 네가 전 장병을 믿게 하려면 얼마나 희생하여야 하는 줄 아느냐?"라고 물으셨다. 막상 죽음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주님 죽어도 좋습니다. 전 장병 예수 믿게 해 주세요."라고 대답하였다. 퇴근한 후 사모에게 "여보 미안하지만 친정에 가서 얻어먹고살아. 월급 받아 전도하는데 다 사용해야 하겠어."라고 하였다. 밤 1시에 커피 끓여 과자봉지와 함께 보초들부터 전도하였다. 그들은 얻어먹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그들을 붙잡고 기도하였다. "아버지 군대에 와서 고생하는데 건강한 몸으로 제대하게 해 주세요. 이 아들이 성공을 해서 이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그 얘기를 들은 부대장이 감동받아 주일에 나왔다. "왜 왔어요?" 물었더니 예배드리러 왔다고 하였다. 사무실에 가더니 전 장병을 나오라고 하였다. 장교고 사병이고 다 나왔다. 교회는 어느새 꽉 찼다. 교회 바깥에도 서 있었다. 연말이 되니 부대장이 전 장병을 신자화 하겠다고 하였다. 자신은 예수 믿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선언하였다. 십계명과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외우게 하였다. 그래서 전 장병이 세례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 3년간 일어난 일이었다. 장교 부부가 성가대를 하였고 전 장병이 예배를 드렸다. 목숨을 걸고 목회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지 모른다. 사도바울도 가는 곳마다 제자가 일어났다. 목숨을 걸로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마지막을 말씀하신 것은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저는 늘 기도하는 게 있는데 "끝까지 복음 전하다가 순교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전 세계 각 나라를 다니며 집회를 한다. 여러분에게도 소원이 무엇인가? 첫째로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 주세요. 둘째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른 복이 다 따라온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 20~22절을 보자.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는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만찬 때 주님의 품에서 물었다.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가롯 유다임을 말하셨다. 요한복음 21장 22~23절을 보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지막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유익이 되는가? 그 사람의 마지막을 안다고 하면 자신이 선지자인 것처럼 교만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아는 것이 교만하게 하며 하나님 일을 하다가 망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마지막에 대해 추측을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람도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 그가 오늘 밤에도 변화할 수 있기에 판단하면 안 된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본받아야 할 것을 생각하고 조금 못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잘 되기를 축복하고 안아줄 마음으로 도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주님은 항상"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너는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얘기하신다. 우리도 끝까지 다른 생각 말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마가복음 10장 28~30절을 보자. 부자는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 고난과 박해가 있을 지라도 백배에 복을 받는 것이다. 장차 받을 상급과 영광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 갖지 말고 주님만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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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1장 27절을 보자.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절을 보자.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가장 중요한 짐은 죄의 짐이다. 7살, 20살, 80살은 각각 해당하는 짐이 있는 것이다. 저희 교회에 한 여학생이 다가오길래 "초롱아~"라고 인사하였다. 그런데 대화하다가 이 학생이 일주일에 학원을 5개 다닌다고 말하였다. "너 굉장히 바쁘구나?"라고 물었다. 학생이 "저 너무 힘들어요~"라고 대답하였다. 이렇듯 수많은 짐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한다 해도 그 사람의 짐을 질 수는 없는 것이다. 짐이 많으면 좋은 일꾼이 될 수 없다. 자녀에 짐을 지어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시다.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짐을 내려놓으면 다른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물과 아픔이 보이는 것이다. 모든 일꾼은 하나님에게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의 짐을 지어주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값을 다 치르신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값으로 죽거나 파괴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모든 죄 값을 치르신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무거운 죄의 짐에서 사해지는 것이다. 부활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와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따라갈 때 능력을 공급해주신다. 이런 가운데 우리의 어깨가 가벼워지며 다른 사람의 짐을 지어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무간사가 이번 주 설교가 무엇인지 물었다. 간사가 "목사님 그게 전부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래서 "뭐가 더 필요해?"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주보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뭐가 더 필요해?'라고 나왔다. 야단을 치려고 전화를 들었다가 생각해보니 너무 좋은 문구였다. 그래서 그에 맞춰서 내용을 수정하였다. 혹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는가 물어보자.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꼭 이루어져야 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시면 그것으로 족해야 한다. 우리가 잘 걸어가면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망의 골짜기와 적이 있는 골짜기를 지나간다. 왜 그렇게 하시겠는가?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라. 죽음이 없는 곳이 없지 않은가? 무질서와 욕망이 가득하다. 우리 삶 주위가 이미 죽음의 골짜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다. 직장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곳을 통과하셔서 마침내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전 강의에서 아빠가 아들에게 대화를 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빠의 욕심이 일을 망치는 것이다.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도울 생각이 없이 욕심으로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시편 23편 1절을 보자.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면 참 좋은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많은 식구가 있지만 여전히 엄마와 아빠는 한분이시다. 많은 소유의 대한 욕심 때문에 좋은 일꾼이 되지 못하고 일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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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교회, 성숙한 신앙
사무엘서 강해 -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
성령의 사람은 기쁨이 넘친다. 감사하면 시원함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성숙해졌구나라고 느낀다. 성장하는 교회가 중요하다. 그 안에 있는 것도 중요하다. 성숙한 신앙, 성장하는 교회라고 해도 괜찮다. 성장하는 교회에는 반드시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먼저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가 필요한 것이다. 정말 성장하는 교회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모두가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가 되자.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되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연단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시련을 내리시고 있다. 다윗은 계속 도망자의 삶과 도피의 생활을 한다. 사울 왕이 죽기까지 다윗의 도피생활은 계속된다.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9장에서 보면 자기 집에서 도망하면서 헤렛 숲으로 도피한다. 2기는 23장에서 26장 말씀이다. 광야에서 여러 군데로 이동하는 순간이다. 신학자들은 3년 정도 얘기한다. 3기는 27장부터 사울이 죽는 순간까지이다. 블레셋까지 4년여의 시간이다. 도피 시간이 얼마나 긴 것인지 볼 수 있다. 헤렛 수풀 - 그일라 - 십 광야 수풀 - 아라바의 마온 광야 - 엔게디 요새- 십 광야 앞 하길라 산으로의 과정이다. 만약 우리도 이런 도망자의 삶을 산다면 매우 힘들 것이다. 1기 때는 사울의 칼날 때문에 피하기에 급급하여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맡기지 못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대한 신앙이 2기에서 회복된다. 다윗이 이전보다도 성숙한 자세로 서 있게 된다. 우리 안에 대한 귀한 도전이 된다. 오늘은 3가지 다윗의 성숙함에 대해 나눠보자. 첫째로 다윗의 열정이다. 그일라는 유대 땅의 경계선에 있다. 그일라는 요새화 되어 있는 성읍이다. 우리나라로 보면 최전방과 마찬가지다. 그일라 사람들이 약탈도 일삼았다. 이 나라의 왕은 사울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돌아보지도 않고 외면한다. 그는 다윗에게만 집중하고 있다. 다윗은 그일라 사람을 도와야 하는지를 하나님에게 묻는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하신다. 그가 나가게 되면 사울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공격해올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일라 사람들을 무시하고 싶을 것이다. 다윗의 마음을 아는 무리들은 다윗을 가로막는다. 사무엘상 23장 3절을 보자. 그일라 사람들에게 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블레셋을 쳤다가 큰일이 일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실은 합리적인 것이다. 다윗은 다시 하나님에게 묻는다. 여호와께서는 그일라로 내려가라고 얘기하신다. 하나님이 사지로 모는 것이다. 대단한 모험인 것이다. 그럼에도 구원하라고 명하신다. 다윗은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왜 그일라로 내려가서 구원하라고 하시는가? 첫째는 과거를 생각하게 함이다. 골리앗을 쓰러트려 구원한 것을 말이다. 다윗은 기름 부 음 받은 자이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웠고 사명을 다해야 함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사명자는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도 사명자인 것이다. 집사, 권사, 장로, 목사도 마찬가지다. 그 사명을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한다. 왕이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사람은 사명자가 아닌 것이다. 다윗이 사명자의 길을 향하여 결단하여 묻고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살아남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블레셋과 사울 사이에 끼인 다윗이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면 능수능란하게 둘 사이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헤렛 숲 속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모험적인 안전을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고 거친 바람과 파도로 덮칠지라도 그것을 헤쳐가며 하나님의 안전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순종을 원하시는 것이다. 나를 인도하시고 함께하시며 품에 안으셔서 날아오르시는 것을 경험하자. 그 분과 함께 날아오를 때 모험적인 안전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명과 비전이 확실하다면 날아오르자. 다윗에게 주신 성숙한 자세는 더 적극적으로 남을 돕고 스릴 있는 모험 있는 안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릴라를 구하러 가는 모습이다. 사무엘상 23장 5절을 보자. 이전과 다른 성숙한 신앙과 열정을 회복시키시면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내 안의 하나님이 주신 열정과 뜨거움이 잠자고 있다면 사명을 다시 감당하겠다고 고백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에 달려갈 수 있길 바란다. 높이 비상할 때 다윗의 열정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달려 나가는 가을이 되길 바란다. 또 하나는 다윗의 기도이다. 우리가 인생 살면서 연륜이 많으신 분들은 더 많은 경험이 있을 것이고 결정을 해야 할 것도 많이 있다.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저희 집에서도 둘째가 계속 질문한다. 아이들이 말하면 놀랍기도 하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한 성도와 전화 통화하였다. 불의한 일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 많은 얘기를 들은 후 결론적으로 "잘하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런 일을 겪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하라고 대답하시지는 않지만 잠시 뒤에 내 상황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내면의 확신을 기도 가운데 부어주시는 것이다. 다윗을 가로막으면서 다윗은 기도하게 된다. 마음이 흔들릴 때 기도하는 다윗이다. 경우에 수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인지 물어야 한다. 확신이 생기면 위험하더라도 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설득하면서 그 일을 진행해야 한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도왔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이 일어나게 된다. 7절을 보자. 사울이 죽일 계획으로 달려든다. 다윗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윗은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세 번째도 하나님 앞에 묻는다. 11절과 12절을 보자.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저를 넘기겠나이까?" 묻는다. 사울이 내려올지도 묻는다. 하나님은 그들이 넘길 것이며 사울도 내려온다고 대답하신다. 두 가지 엿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다윗과 함께하는 공동체가 존재함에도 사울이 내려온다고 하는 것을 듣는 순간 힘들게 생각되는 것이다. 밥 맛이 뚝 떨어지는 것이다. 다윗은 두려움에 입에서 나오는 데로 질문한다.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알려주신다. 결국 그들이 배신할 것도 말씀하신다. 다윗이 왜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 그일라는 정착할 만한 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망해야 한다고 말하신다. 그일라 사람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다윗을 잘 대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친절함을 믿지 않았다. 다윗은 인간적인 친절함도 의지하지 않고 묻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운 영적 삶을 회복한 것이다. 기도의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바꾸시고 확신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것을 경험할 수 있길 바란다. 시편 25장 14절을 보자. 여호와의 친밀함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1장 9절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어떤 대적이 올무를 설치해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자. 우리의 길이 암흑일지라도 낮이면 밝아서 피해 갈 수 있는 것이지만 지금은 어둠이 가득하다. 주님께서 빛을 비추시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분에 대답을 들으면서 가는 것이 친밀함이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심을 기억하자. 하나님 앞에 묻고 또 묻는 그 즐거움을 경험하자. 이전에 여호와의 친밀함과 경외함을 느끼는 신앙으로 올라서자. 주님과 깊이 동행하실 때 인도하심을 믿자. 내 기도의 삶을 어떻게 드릴 지 결단하자. 마지막으로 다윗의 온유함이다. 사무엘상 23장 13절을 보자. 더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다. 600명 정도는 남자만 계산한 것이다. 전부 3000명 정도 되는 인원이다. 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다윗이 욕심을 낸다면 남자 600명으로도 싸울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일라 성이 전쟁터가 되는 것이며 곤경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뜻을 받들어 도망하는 것이다. 꼭 피를 흘려 이기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여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족끼리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전쟁을 피하는 지혜를 주시는 것이다. 민족끼리 싸우라고 기름 부으신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정처 없이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온유함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다. 성격 좋은 사람도 맞지만 힘이 있음에도 조절하는 사람이다. 권투선수가 사각 링에서 자신의 기술로 이겨내는 선수라고 힘자랑한다면 온유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표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다윗에게 그일라 사람과 사울은 적이 아닌 것이다. 동족인 것이다. 우리 공동체에도 마찬가지다. 교회에서도 증오하는 사람이 대적이 아닌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결코 사람과 싸우지 않는다. 싸움의 대적은 에베소서 6장 12절에 있다. 마귀이다. 귀신의 종류가 나온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있다면 돌아가야 하며 무조건 후퇴해야 한다. 마귀가 있으면 전진하고 사람이 있으면 후퇴하는 것이다. 이것이 온유함인 것이다. 이전에 다윗은 교만하였지만 2기에서는 납작 엎드렸다. 하나님은 다시 빛으로 인도하셨다. 2012년도에 제자훈련을 같이 했던 사람의 얘기를 하고 싶다. 이 분이 팀장으로 발령하였고 승진하였다. 7년 만에 벌어졌다. 도서관에서 근무하였다. 계속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핍박하던 그분 때문에 마음 아파하였다. 훈련이 끝난 후에도 상담을 계속하였다. 기도하였다. 함께 훈련받았던 집사님들도 카톡 방 안에서 위로하였다. 그런데 그 핍박하던 상사가 병가를 내었고 다시 복직하였을 때는 팀원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반전이었다. 그래서 똑같이 괴롭혀주겠다고 말을 하였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나가게 되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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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8 주일예배 (0) | 2019.09.06 |
2019/07/26 금요예배 (0) | 2019.08.12 |
2019/07/21 주일예배 (0) | 2019.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