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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힘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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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은 영성에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영적 변화를 위해 묵상은 빼놓을 수 없다. 묵상은 우리 마음에 말씀하시려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이다. 시험을 칠 때 책을 정복하듯이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스며들도록 기다려야 한다.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음침한 영혼에 진리의 빛을 비추시도록 내어 맡겨야 한다.

모든 것은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일어난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자아의 소리와 뚜렷이 구분된다. 묵상의 삶은 표피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심장 안으로 말씀이 녹아들어 가는 일이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겉도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독대가 없는 건조한 종교적 관습에만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내밀한 상호 소통을 통해 친밀함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묵상은 기계적이거나 공식적인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꾸밈없는 사귐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하는 태도보다 성령께서 내 안에 말씀하실 때까지 수동태로 있어야 한다. 성급한 마음으로 어떤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자신을 다그치기보다 서서히 충만히 임하는 것을 기대하며 기다려야 한다. 조급증은 다가오시는 은혜의 숨결과 영적 리듬을 거슬리게 한다. 묵상은 지적인 작업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 찾아오시는 은혜에 민감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 묵상은 이성적 이해와 함께 체험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 묵상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해야 한다. 온몸으로 체험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알 듯 모를 듯 모호하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하나님을 경험한 것은 지식적인 이해를 훨씬 넘어선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 접촉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 육신 하신 말씀이다. 말씀 경험은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마주침이다.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온전히 체득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

말씀의 내면화 작업이 일어날 때 순종으로 이어진다. 순종이 반복될 때 말씀과 나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된다.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을 때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말씀이 주님의 인격 속에 내재화되어 있었다. 마귀가 시험을 하자마자 즉각적으로 말씀을 사용하여 마귀를 몰아내셨다. 예수님 자신의 삶 가운데 이미 경험하고 있었던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단순히 암송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묵상을 통해 말씀의 내재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는 구절을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을 수 있다. 목자가 어떤 분인지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깊어진 묵상을 통해 목자이신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경험하는 시간을 가질 때 모든 것은 달라진다. 묵상은 말씀으로 영혼의 풍성함을 맛보는 일이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의 말씀으로 영혼을 사로잡는다. 머릿속에만 맴도는 말씀이 아니다. 심장을 달구는 말씀이다. 말씀이 가슴으로 충만히 흘러내릴 때 영혼은 춤추게 된다. 어거스틴은 묵상 행위를 "불변의 하나님을 지각하는 것"으로 보고 거기에서 내면의 놀라운 기쁨이 수반된다고 했다.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즐거움이고 몰입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골3:16)."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 앞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 단어 하나하나를 새기며 맛을 보고 즐기는 경험이 쌓여야 한다. 말씀과 함께 한 시간의 축적은 세월이 흐르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파도가 밀려온다. 기독교의 묵상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다. 채워짐에서 넘쳐 남으로 흘러가게 하는 역사가 일어날 때 자유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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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故 옥한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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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는 바울을 본다. 고상하다는 말은 품위나 몸 가짐이 훌륭하다는 의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고다"라는 것이다. 바울은 보통 흥분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은 13장 24절을 보면 예화가 있다. 어느 밭에서 일하다 땅속에서 보물단지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보물이었다. 궁리하다 그것을 다시 집어 넣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돈을 빌려서 그 밭을 통째로 샀다. 그래서 너무 기뻐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모습이 이런 것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예수님을 두고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저는 이런 은혜가 그립다. 30대만 해도 대학생들과 모이면 한주도 빠지지 않고 "주 예수와 바꿀 수 없네." 그 찬양을 부르며 감격하였다. 아름다웠다. 40대 들어서 사랑의 교회를 개척해서도 마음이 식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뜨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식어지는 것 같다. 나이 들어서? 감흥이 식어진다. 그래서 이 본문은 저 자신이 은혜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저 자신만이 아니다.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우리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고다라는 은혜를 받자. 바울이 예수님에게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젊은 시절부터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나를 의로운 자로 생각하실까?"였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노력했다. 할레도 받고 순수혈통으로서도 자부심을 갖었으며 바리새파에 들어가서 가브리엘 스승에게서 특별하게 지도받았다.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율법에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만하였다. 마치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청년과 같았다. 사도 바울은 어느 경지에 올랐다.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가 인류의 구원자임을 알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율법에 선행으로 얻을 수 있는 '의'가 아님을 알았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인 것이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죄 없는 그분이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잘 지켜서 예수님이 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뒤집혔다. 그는 깨어졌다. 새로운 은혜가 열렸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라고 하였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자. 너무 충격적인 말씀이다. "하나님이 죄를 모르는 예수님을 죄로 삼으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딴 사람이 되었다. 예수를 생각만 해도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다. 오물과 같은 것이다. 그가 행했던 선행들이 배설물처럼 느껴졌다. 예수님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 이 은혜에 감격하여 독신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쳤다. 사람이 바뀐 것이다. 흔히 인생의 종착점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인격도 남지 않는다는 '단멸론'을 은근히 생각하며 안심한다. 크게 잘못되었다. 창조자 하나님은 죽음은 '건널목'이라고 하셨다. 잠깐 넘어가는 것이다. 종점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을 보자. 로마서 14장 10절을 보자. 우리가 심판 대위에 서는 것이다. 두려운 일이다.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일한 질문은 내가 가진 '의'가 무엇이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 하나님의 눈에는 죄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만족할 만한 '의'가 무엇이냐? 모든 운명을 결정짓는다.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의'를 가진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대에 오를 것이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그림을 소유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조끄마한 그림. 내가 보기에는 만화 같다. 무식하다고 들릴 까 봐 얘기도 못한다. 내가 이해 못하는데 어떡하겠는가? 하나님 앞에 그림을 들고 가면 '의'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무명의 화가가 있었다. 사정이 어려워 미군과 사귀며 미군에게 재료들을 사달라 부탁하였다. 보답으로 빨래터라는 그림을 주었다.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나중에 미군이 늙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걸려있던 그 빨래터라는 그림이 비싸다는 소리를 들어 내놓았다. 45억 2천만 원. 경매가였다. 우리 예수님이 "내 '의'를 너에게 주마. 너는 나를 믿으면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 너의 죗값을 지불했고 내가 세상에 살 때 율법도 다 지켰기 때문에 나의 '의'를 네게 주마."라고 얘기하신다. 이것을 들고 가면 하나님이 들여보내 주시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기독교 교리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만큼 최고가 없다."고 하였다. 장엄하다. 제대로 이해하면 세상에 모든 것이 시시하게 보인다.  인생관이 새로워진다. 사람이 바뀐다. 삶이 달라진다. 저는 25년 사역하며 많이 보았다. 멜린 테러 독스 목사는 '감옥생활에서 찬송 생활을"이라는 책을 1970년대에 썼다. 원래는 질이 아주 안 좋은 사람이었다.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하던 사람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일 때 특사로 풀려났다.  그 후 할아버지에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었다. 자기 같은 흉악한 죄인도 죄 없는 자처럼 의롭다 해주신다는 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삶이 달라졌다. 하루는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돈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재래식 화장실이다. 그동안 불법으로 모은 수표가 가득 든 것을 화장실 안으로 던졌다. 돈을 던질 때마다 기쁨이 헤일처럼 찾아왔다고 고백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로 인정하시고 의인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을 알 때 변화가 이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로이다. 세상을 뒤집을 힘이다. 바울은 로마제국을 뒤집어서 기독교를 국교로 만든 사람이다. 중세시대에는 복음의 빛을 온 세상에 비추게 앞장선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은혜에 힘으로 중세가 일어선 것이다. 부패한 영국 사회를 피의 혁명으로 살린 요한 웨슬레는 로마서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믿음 때문에 영적 거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오염물질이 쌓여간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의식이 없다. 하나님의 심판대는 흥미가 없다. 이런 사람들과 어울린다. 우리도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는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안주하고 있다. 기독교의 본질적 주제 말씀에 대하여는 듣기 지겨워한다. 그 대신 들으면 기분이 좋은 말씀들만 따라가려는 좋지 못한 근성들이 교회 안에 자리 잡으려 한다. 그저 무엇이나 믿고 구하면 소원 성취한다는 것에도 좋아한다. 물론 이것도 중요한다. 그러나 부제이다. 주제가 아니다. 밥이 아니다. 과자다. 조엘 오스틴 목사를 알 것이다. 긍정적인 자아를 찬양하는 것이 복음인 것처럼 포장하였다. 긍정의 힘? 사람들 구미에 맞게 쏟아낸다. 폭스 뉴스에 출연하였다. 미국 대통령 후보 가운데 몰몬교 신자가 있다. 조엘 오스틴 목사에게 물었다. 몰몬교가 기독교입니까? 나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좀 당황한 진행자가 "몰몬교를 만든 조셉 스미스는 이단으로 찍혔다. 그래도 기독교인가?" "나는 그런 거 개의치 않는다." 조엘 오스틴은 복음을 훼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단이 아니면서 이단처럼 해를 끼친다. 성경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보자. 다분히 최면적이고 긍정을 강조하는 성경 문구가 어디 있나? 예수 믿는 사람이 긍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긍정의 원천이기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의 은혜에 붙들게 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긍정의 힘을 얘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정말 심각한 것은 사람들이 오스틴의 메시지를 좋아한다. 세상 사람도 좋아한다. 세상 사람들도 같이 좋아하는 것이 어떻게 진리인가? 제대로 알자. 바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고다."라고 해야 한다. 걱정이다. 불안하다. 귀 막은 성도들이 많을까 봐서. 이런 성도들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런 운 죄인이라도 십자가의 주님을 믿으면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흠도 없는 사람처럼 받아주시는 놀라운 은혜. 이 얘기를 밤낮으로 묵상하면 긍정적일 수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정죄하지 못하신다. 예수님의 '의'이다. 예수님을 정죄할 수 없다. 우리도 정죄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절대 정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정죄할 수가 없다. 눈물로 감사할 수 있다.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낙심이 일 때도 주저앉지 않는다. 그 은혜로 세상을 산다. 저는 암부 로스가 한 얘기 중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얘기를 좋아한다. 에서가 장자이다. 에서가 축복을 받아야 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사냥하러 갔다. 어머니는 야곱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하였다. 에서처럼 털을 붙여서 이삭이 못 알아보게 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야곱이 축복을 받았다. 기도했다. 축복을 다해버렸다. 그 사실을 놓고 암부 로스는 야곱은 스스로 장자에 권리가 없으므로 그 형에 의복에 몸을 숨기고 겉옷을 걸치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형인체 하여 축복을 받았다. 이처럼 우리도 맡형이신 예수님의 순결과 '의'아래 몸을 숨기고 하나님 눈에 흠도 티도 없는 '의'로 보이게 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다 세 번이나 감옥에 끌려간 철로 역정을 읽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가 부족하다고 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선이 우리의 '의'를 훌륭하게 하거나 악하게 하지 못함을 안다.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구원자 이심을 우리의 '의'가 되심을 믿는가? 그 의를 들고 하나님 앞에 가면 영접받을 수 있다고 믿는가? 우리도 바울처럼 외쳐야 한다. 전부이다. 외치자.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인생은 잠깐이다. 사라진다. 마지막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자이다. 복 받은 자이다. 그 의를 우리의 '의'로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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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강 포도주로 변합니다

성경해석학(Biblical hermeneutics)/나침반 바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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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가 얼마일까? 1787년 산 포도주이다. 한 병에 1억 9천만 원이다. 10잔이 나온다. 1잔에 1900만 원이다. 이런 포도주를 누가 마시고 살까? 이번에는 이 포도주보다 더 비싼 얘기를 나눠보자. 예수님이 친히 만드신 포도주 얘기다. 하나님 백성에게 약속된 포도주의 영광이다. 예수님께서 3년에 사역을 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이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다. 잔칫날 포도주가 떨어졌다. 예수님 살던 때로부터 1500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받았으며 가족관계로 엮어져 있었다. 어떤 집에 잔치가 있을 경우 일주일간 일손을 놓고 흥겹게 놀았다. 여기에서 포도주의 역할은 중요하다. 잔치하다가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가문의 명예가 떨어지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뭔가 대단한 역할을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나온 포도주를 맛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 1잔에 1900만 원짜리보다 더 귀중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에서 포도주를 만든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도 요한도 같이 있었다. 사도 요한은 후에 이 사건을 나중에 기록하였는데 표적이라고 기록하였다. 표적은 '신호+기적"의 합성어이다. 교통신호를 생각해 보자. 빨간 신호는 멈추라는 것이다. 녹색이면 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다. 신호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들에게 보내는 신호이다. 물이 포도주가 된다는 신호이다. 허드렛물이 값진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이다. 현관 입구에 있는 결레용 물이다. 이것은 용도대로 쓰임 받은 후 버려지는 물이다. 식수가 있는데도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 그럴까? 바로 그 허드렛물이 우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영원한 시궁창으로 버려진다. 하나님은 고통 속에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허드렛물처럼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요한은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진 기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뭔가를 행하실 기대를 말이다. 이런 굉장한 사람이 로마에 박해로 돌아가신 것?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죗값을 사하신 것이다. 내 인격 속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거나 낙심한다. 낙심은 사탄이 우리에게 값 비싸게 파는 것이다. 어느 날 사탄이 세일을 하였다. 가장 비싸게 팔았던 도구는 '낙심'이다.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있다가도 낙심이 들어서면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다. 우리 마음속에 어떤 상황이든지 기대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없다면 이것을 포기한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 기억하자. 허드렛물을 가지고 향기로운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이 이런 '기대'를 얘기하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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